NEW BOOKS

사과 얼마예요 -조정인 시집 (민음사)

 

사과 얼마예요 -조정인 시집 (민음사)

20190702_175206민22.jpg

비극을 감지하는 기민한 촉수로

시의 성소에서 톺아보는 세계의 슬픔

삶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담은 감각적인 시편들을 선보여 온 조정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사과 얼마예요』가 ‘민음의 시’ 257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진솔해진 삶의 언어와 더욱 깊어진 성찰적 언어로, 삶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섭리의 기미를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 『사과 얼마예요』는 수많은 층위의 비극을 인지하는 기민한 촉수를 품고 있다. 생 전체에 팽배한 비극의 원인과 존재의 이유를 가만히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 읽으며 우리도 이전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미지의 슬픔으로 한발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소개

조정인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동시집으로 『새가 되고 싶은 양파』가 있다. 

목차

1부 페이지들

키스

함박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입들

페이지들

눈의 다른 이름들

사과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는 두 손을 꺼내 부푼 스커트를 눌렀다

나무가 오고 있다

백 년 너머, 우체국

책이 왔다

사과 얼마예요

모과의 위치

소환되는 비

적(寂)

 

2부 흙을 쥐고 걸었다

진흙은 아프다

내 잠 속에 기숙하는 자

무성한 북쪽

조선인

습(習)

기념하는 사람들

흙을 쥐고 걸었다

정육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

개의 영혼을 보았다

새가 태어나는 장소

서쪽

검은 시간 흰 시간

갓 구운 크루아상에 대해

부서진 시간

쇠의 울음을 불러낸 남자

거절된 꽃

조그만 자전들

국 이야기

시간의 갱도

 

3부 화병의 둘레

해변의 생일상

여자는 이름이 존재라 했다

화병의 둘레

바닷가 민박집

해변의 수도승

버찌, 혹은 몰락

우는 신

소속되다

알비노 보호구역

비망의 다른 형식

포유류

그곳에 손을 두고 왔다

조용한 식사

창문들이 돌아오는 시간

위반의 밤

 

4부 Angel in us

Angel in us

들판을 지나는 사람

폐허라는 찬란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는 말

행복한 눈물

식물의 백야

그 많은/ 흰,

그날, 상상할 수도 없이 먼 그곳의 날씨와 어린 익사자의 벌어진 입에 대한 서사

 

작품 해설┃조재룡

섭리의 뼈와 살, 소립자(素粒子)의 거처

책 속으로

그의 무심이 정면으로 날아든 돌멩이 같던 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물이 부어지며 길게 금 가는 유리잔이던 날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질문: 영혼은 찢어지는 물성인가 금 가고 깨어지는 물성인가, 하는 물음 사이

명자나무가 불타오르고
유리의 일과 나 사이 4월은 한 움큼, 으깨진 명자꽃잎을 손에 쥐어 주었다
―「백 년 너머, 우체국」에서

사과 아닌 사과도 없지만 사과인 사과는 더욱 없지요 서쪽 아닌 서쪽도 없지만 서쪽인 서쪽은 더욱 없는 것처럼 봉쇄된 우물…… 적막이지요 온몸이 커튼인 깜깜한 밤이 저기 옵니다 덜컥이는 틀니 아니, 사과 얼마죠?
―「사과 얼마예요」에서

색과 소리, 모든 몸짓과 말의 바탕이던
당신이 두고 간 마지막, 텅 빈 색을 상자에 담아 왔네

떠난 뒤에 무성해지는 사람이 있네, 왼발 엄지발가락 발톱이 비어
내 안의 검은 악기를 타는
―「무성한 북쪽」에서

출판사 서평

 

 

길어 올린 슬픔

한 영혼이 다른 하나에게 다다르려면 어떤 경로를 거쳐야 했나. 인간의 침대에서 인간의 옆구리에 코를 묻고 잠들며, 너는 존재의 평등을 나누는 기분이었나. 아주 걸을 수 없게 된 두 해 동안, 너는 늘 내 왼쪽 가슴에 안겨 산책을 나갔다. 간혹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던, 두 눈에 고인 천국이 가만가만 나를 흔들고는 했다.
―「개의 영혼을 보았다」에서

시인은 현실이라는 우물에 고여 있는 순간들을 시의 언어로 길어 올린다. 시인의 시선은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개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무심코 펼친 책에서 운명적인 문장을 만났을 때, 늙은 어머니와 조용히 저녁을 먹을 때처럼 일상적인 차원을 향하는 동시에 실제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건들에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다양한 층위의 순간들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비애의 감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우물 밖으로 올라온 순간들은 당장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결과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현실 너머의 진실을 비추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선은 너무 어두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곳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더 깊은 곳으로

사과가 떨어지는 건 이오니아식 죽음. 경쾌하고 정교한 질서 속의 일.

닿을 수 없는 두 입술의 희미한 갈망으로 지상에 먼저 발을 디딘 사과의 그림자가 사과를 받쳐 주었다. 그림자의 출현은 태양과 사물간의 밀약에 천사가 개입하는 것.
―「행복한 눈물」에서

시인은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어 어두운 우물 아래로 직접 내려간다. 현실을 가득 메운 비애의 감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근원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 세계의 슬픔을 짊어지고 슬픔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행위는 사뭇 비장하다. 언제 끝날지, 아니면 끝이 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한 이 시도가 이토록 절실한 이유는 그 근원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본능적 확신이 작동하기 때문일 테다. 근원은 아직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시인이 의지한 밧줄은 무한히 늘어나고, 우물 속 어둠은 끝없이 이어진다. 자신을 걸고 나선 길 위에서 시인은 많은 슬픔들의 해답이 되어 줄 근원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알 수 없음

태초의 꿈으로부터 시작된 한 줄, 기나긴 문장이 이 거리를 흐른다. 문장은 끝내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머잖아…… 우리가 저마다의 배역에 열중해 있을 때, 무대 전면으로 거짓말처럼 자줏빛 엔딩 커튼은 내려질 것이다.
―「그날, 상상할 수도 없이 먼 그곳의 날씨와 어린 익사자의 벌어진 입에 대한 서사」에서

시인이 모호한 근원을 탐구하며 구한 답은 하나다. ‘알 수 없음.’ 그러나 시인은 “끝내 완성되지 않을” 과정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반복한다. 모호한 근원으로부터 계속되는 세계의 슬픔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때로는 그 과정이 너무 지난하여 나와 관계없는 슬픔은 외면해 버리고 싶다. 나와 멀리 떨어진 비극들은 영원히 먼 곳에 남겨 두고 싶다. 『사과 얼마예요』는 모든 슬픔과 비극들을 자신의 것처럼 기억하여 지난한 고독에 새로운 문장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해 나갈 수도 있음을 알려 주는 시집이다. ‘알 수 없음’을 벌써 알고 있는 시인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알 수 없고, 끝내 완성되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계속한다는 것. 세계의 슬픔을 끈질기게 응시하여 시로 기록하겠다는 것.

 

 

[ⓒ 뉴욕예술인협회(http://www.nyaa.kr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